(문화재청)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주변지역에서 발굴된 목간들이 공개되었다.
7세기 초로 편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것 중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바로 태극과 유사한 문양의 목간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한겨레)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태극 문양은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으로 682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목간의 편년이 7세기 초라고 추정되고 있으니 가장 오래된 태극문의 타이틀이 바뀌는 셈이다.
주돈이가 태극 문양을 도해한 것은 11세기이다. 감은사지 태극문이나 계림로고분 금장 보검의 태극문 등을 두고 태극 문양의 기원이 우리나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태극 사상의 표현인지는 불분명하다. 뒷바침할 사료가 마땅치 않으니 논리적으로 비약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태극문양은 일본 가문의 문장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의 기원을 태극 사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보통 'ともえ[巴]'라고 하여, 기와의 수막새 등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불을 막는 물의 소용돌이 문양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문양들과 우리나라 문양과의 관계, 우리나라 태극문이 일본의 태극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의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일본 가문의 문장으로 자주 등장하는 태극문)
어쨌든 고대의 태극 문양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아직까지는 없다. 이번에 공개된 목간은 칼 모양으로 한쌍을 이루고 있고, 태극문 이외에도 해석되지 않는 여러 문양들이 같이 그려져 있다. 다른 목간에서 처럼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문양을 넣은데에는 아마도 주술적, 또는 종교적 의미의 장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공개된 다른 유물들과의 연관성이라든지, 해당 발굴 지역과의 연관성을 좀더 면밀히 연구해본다면, 어떤 다른 단서들이 나오지 않을까?
[게몽]
+ 이하 보도자료 전문(문화재청)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범)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31점의 백제시대 목간을 공개했다. 백제의 중앙(現 충남 扶餘)이 아닌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이 목간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기록된 내용과 수량이 풍부하여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이번에 공개하는 목간들은 2008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상태가 양호하여 이미 공개된 바 있는 3점을 포함해 모두 31점이며, 올해 5월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완료한 것이다.
31점의 목간은 직경 5.6m, 깊이 4.8m의 백제 사비시기(A.D. 538~660년)에 해당하는 대형원형수혈유구에서 일괄 출토되었다. 그 중 13점은 묵서가 잘 남아있고 판독이 가능하며 그 종류는 문서목간, 꼬리표(付札)목간, 봉함목간(封檢), 다면목간(觚,고), 습자(習字)목간 등으로 지금까지 국내 유적 중 가장 다양한 종류가 확인되었다.
특히 목간들 중 길이 60.8㎝, 너비 5.2㎝, 두께 1㎝의 크기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목간 중 가장 길고, 가장 큰 목간이 있어 주목된다. 이 목간에는 총 57자의 묵서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수미지(受米之…), 공지(貢之) 등이 쓰여 있다. 이는 지방 관청에서 공납과 그 과정을 기록한 행정문서 목간으로 판단된다. 한편, 국내에서 최초로 출토된 봉함목간(封緘木簡, 중국식 표현으로 封檢)은 주로 관청에서 문서나 물건을 운송하는데 사용되는 목간의 한 형태로 봉투의 기능 또는 기밀을 요하는 문서 꾸러미나 물건을 운송할 때 쓰이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촌락문서격인 목간에는 ‘대사촌(大祀村)’의 인명·가축의 실태와 ‘수전(水田)’·‘백전(白田)’·‘맥전(麥田)’ 등 토지의 경작형태와 ‘형(形)’이라는 토지 단위 및 ‘72석(石)’ 등의 소출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백제 경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한 것이다.
이외에도 양면 묵서가 되어 있는 또 다른 목간의 한쪽 면에는 ‘병지(幷之)’라고 묵서되어 있는데, ‘之’는 ‘~하다’라는 백제의 이두식 표현으로 이두가 이미 백제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목간 외에도 칼(刀) 모양의 독특한 형태를 띤 나무판에 태극문이 그려진 목제품 한 쌍이 함께 출토가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으로 알려져 있던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682년)보다 앞서는 것으로, ‘易’, ‘五行’ 등 백제의 도교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백제의 사상사 연구에 일조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목간과 목제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유물(대형호, 발형토기, 백제 기와 등)과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과 비교하면 7세기 초로 편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영산강 고대문화권역의 중심지인 나주에서의 목간 출토는 백제 도성이 아닌 지방지역에서 처음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문헌사료가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특히, 백제의 중앙과 지방 세력과의 관계, 지방 행정 운영, 촌락의 농업 생산, 백제의 사상사·산업사 등에 대한 정보들을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목간의 내용 중 인력을 관리하는 내용과 토지 단위(形)당 소출량, 지명(前港, 大祀村), 관직명(奈率, 扞率, 德率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 지역 고대사회 구조의 일면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나주 복암리 유적 일대가 영산강 유역의 7세기대 백제 지방 통치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앞으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조사에서 확보된 자료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여 이 유적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명해 나갈 예정이며, 복암리 일대에 대한 연차적인 조사를 더욱 확대 진행해 나갈 계획이다.
붙임 : 사진자료
[사진 1]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그 주변지역
[사진 2] 목간이 출토된 대형 수혈유구 전경
[사진 3]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과 목제품
[사진 4] (左)대형목간, (中)촌락문서 목간, (右)봉함(封緘)목간 사진 및 적외선사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뉴스웨이브)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태극 문양은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으로 682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목간의 편년이 7세기 초라고 추정되고 있으니 가장 오래된 태극문의 타이틀이 바뀌는 셈이다.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네이트 백과사전)
주돈이가 태극 문양을 도해한 것은 11세기이다. 감은사지 태극문이나 계림로고분 금장 보검의 태극문 등을 두고 태극 문양의 기원이 우리나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태극 사상의 표현인지는 불분명하다. 뒷바침할 사료가 마땅치 않으니 논리적으로 비약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태극문양은 일본 가문의 문장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의 기원을 태극 사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보통 'ともえ[巴]'라고 하여, 기와의 수막새 등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불을 막는 물의 소용돌이 문양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문양들과 우리나라 문양과의 관계, 우리나라 태극문이 일본의 태극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의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일본 가문의 문장으로 자주 등장하는 태극문)
어쨌든 고대의 태극 문양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아직까지는 없다. 이번에 공개된 목간은 칼 모양으로 한쌍을 이루고 있고, 태극문 이외에도 해석되지 않는 여러 문양들이 같이 그려져 있다. 다른 목간에서 처럼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문양을 넣은데에는 아마도 주술적, 또는 종교적 의미의 장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공개된 다른 유물들과의 연관성이라든지, 해당 발굴 지역과의 연관성을 좀더 면밀히 연구해본다면, 어떤 다른 단서들이 나오지 않을까?
[게몽]
+ 이하 보도자료 전문(문화재청)
백제 기밀문서 봉검(封檢) 등 목간(木簡) 30여점 전모 밝혀져
- 나주 복암리 유적 출토 목간 공개-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범)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31점의 백제시대 목간을 공개했다. 백제의 중앙(現 충남 扶餘)이 아닌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이 목간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기록된 내용과 수량이 풍부하여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이번에 공개하는 목간들은 2008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상태가 양호하여 이미 공개된 바 있는 3점을 포함해 모두 31점이며, 올해 5월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완료한 것이다.
31점의 목간은 직경 5.6m, 깊이 4.8m의 백제 사비시기(A.D. 538~660년)에 해당하는 대형원형수혈유구에서 일괄 출토되었다. 그 중 13점은 묵서가 잘 남아있고 판독이 가능하며 그 종류는 문서목간, 꼬리표(付札)목간, 봉함목간(封檢), 다면목간(觚,고), 습자(習字)목간 등으로 지금까지 국내 유적 중 가장 다양한 종류가 확인되었다.
특히 목간들 중 길이 60.8㎝, 너비 5.2㎝, 두께 1㎝의 크기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목간 중 가장 길고, 가장 큰 목간이 있어 주목된다. 이 목간에는 총 57자의 묵서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수미지(受米之…), 공지(貢之) 등이 쓰여 있다. 이는 지방 관청에서 공납과 그 과정을 기록한 행정문서 목간으로 판단된다. 한편, 국내에서 최초로 출토된 봉함목간(封緘木簡, 중국식 표현으로 封檢)은 주로 관청에서 문서나 물건을 운송하는데 사용되는 목간의 한 형태로 봉투의 기능 또는 기밀을 요하는 문서 꾸러미나 물건을 운송할 때 쓰이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촌락문서격인 목간에는 ‘대사촌(大祀村)’의 인명·가축의 실태와 ‘수전(水田)’·‘백전(白田)’·‘맥전(麥田)’ 등 토지의 경작형태와 ‘형(形)’이라는 토지 단위 및 ‘72석(石)’ 등의 소출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백제 경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한 것이다.
이외에도 양면 묵서가 되어 있는 또 다른 목간의 한쪽 면에는 ‘병지(幷之)’라고 묵서되어 있는데, ‘之’는 ‘~하다’라는 백제의 이두식 표현으로 이두가 이미 백제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목간 외에도 칼(刀) 모양의 독특한 형태를 띤 나무판에 태극문이 그려진 목제품 한 쌍이 함께 출토가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으로 알려져 있던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682년)보다 앞서는 것으로, ‘易’, ‘五行’ 등 백제의 도교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백제의 사상사 연구에 일조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목간과 목제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유물(대형호, 발형토기, 백제 기와 등)과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과 비교하면 7세기 초로 편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영산강 고대문화권역의 중심지인 나주에서의 목간 출토는 백제 도성이 아닌 지방지역에서 처음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문헌사료가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특히, 백제의 중앙과 지방 세력과의 관계, 지방 행정 운영, 촌락의 농업 생산, 백제의 사상사·산업사 등에 대한 정보들을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목간의 내용 중 인력을 관리하는 내용과 토지 단위(形)당 소출량, 지명(前港, 大祀村), 관직명(奈率, 扞率, 德率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 지역 고대사회 구조의 일면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나주 복암리 유적 일대가 영산강 유역의 7세기대 백제 지방 통치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앞으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조사에서 확보된 자료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여 이 유적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명해 나갈 예정이며, 복암리 일대에 대한 연차적인 조사를 더욱 확대 진행해 나갈 계획이다.
붙임 : 사진자료
[사진 1]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그 주변지역
[사진 2] 목간이 출토된 대형 수혈유구 전경
[사진 3]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과 목제품
[사진 4] (左)대형목간, (中)촌락문서 목간, (右)봉함(封緘)목간 사진 및 적외선사진
+ 언론에 취재된 사진들.
(연합뉴스/다음)
(연합뉴스/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