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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5 피맛골서 조선전기 백자호 발견
  2. 2009.04.15 조선시대 사신도 벽화묘 첫 발견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청진동 일대 피맛골에서 최상급의 조선 전기 항아리형 순백자 백자호(壺) 3점이 발견되었다.
이를 감정한 도자사 전공 윤용이 교수와 나선화 박사는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며 기벽은 두꺼운 편으로,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한 흔적이 있다. 유색은 약간의 푸른기가 도는 유약을 전면에 베풀었다. 굽은 안다리굽으로 가는모래를 받쳐 구웠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백자호는 건졌지만, 피맛골은 그렇게 사라지는구나.
피맛골은 말 그대로 파괴되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니, 백자호처럼 나중에라도 발견될 수도 없다.
없어진 후에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게몽]

+ 보도자료 (문화재청)

서울 종로 청진1지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이 허가하여 매장문화재 발굴조사기관인 한울문화재  연구원에서 조사 중인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235-1 일원의『서울 종로 청진 1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유적 발굴조사』에 대해 1차 지도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 지도위원회 개최 >
   ㅇ 일  시 : 2009. 6. 5(금) 16:00
   ㅇ 장  소 : 서울시 종로 청진 1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발굴조사 현장
   ㅇ 참석자 : 지도위원(매장분과 등), 사업시행자 등

   < 발굴출토 유물 >
   ㅇ 조선 15~16세기 백자호(白瓷壺) 3점(높이 35.5cm, 36.5cm, 28.0cm)
    - 금번 발굴조사 시 출토된 백자호 3점은 무문(無紋)의 순백자로서 조선   초기에 제작된 호(壺)의 형태를 띠며, 경기도 광주 일대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최상급의 백자로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제작된 상품(上品) 자기들로 판단된다.


붙  임  사진자료 1부.

 위 자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울문화재연구원(☎ 031-271-5191/ 책임조사원 최종규 ☎ 010-3299-1188/ 조사원 박호승 ☎ 010-8377-3314)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청진1지구 발굴조사 출토 백자입호 현황

유   물   목   록

연번

유물명

수량

크기(cm)

시대

사진

기고

구경

저경

1

 입호①

1

35.5

16.0

15.2

조선

2

 입호②

1

36.5

16.9

16.0

조선

3

 원호

1

28.0

14.0

13.3

조선

3건 3점



- 출토위치 :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235번지
- 출토유물 추정시기 : 15c ~ 16c
- 출토상황 : 19C 내외의 건물지를 조사하는 과정 중 건물 기단 전면에 구덩이를 파고 3점을 매납했음. 매납 양상을 볼 때 어떠한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아니라 급하게 매납한 양상을 보이고 있음

- 유물 설명(윤용이, 나선화)

조선 15~16세기 백자호(白瓷壺) 3점

백자호 1. 높이 35.5cm, 입지름 16.0cm, 밑지름 15.2cm
백자호 2. 높이 36.5cm, 입지름 16.9cm, 밑지름 16.0cm
백자호 3. 높이 28.0cm, 입지름 14.0cm, 밑지름 13.3cm

 금번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백자호 3점은 무문의 순백자로서 전형적인 조선 초기 호의 형태이다.

 기형이 비슷한 2점의 백자호(白瓷壺)는 입호(立壺) 형태로 구연부가 짧고 납작하게 말린 것이 특징이다. 동체(胴體)가 어깨부분에서 팽배해졌다가 하부로 갈수록 줄어들어 하단부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백자입호는 기벽이 두꺼운 편으로,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한 흔적이 있다. 유색은 약간의 푸른기가 도는 유약을 전면에 시유하였다. 굽은 안다리굽으로 가는모래를 받쳐 구웠다.

 구연부가 일부 상실된 백자호 1점은 다른 2점에 비해 높이가 낮고 둥근 형태의 원호(圓壺) 스타일이다. 입술부분은 입호와 비슷하게 둥글고 납작하게 말리었으나 어깨가 급격하게 팽만하였다가 둥근 곡선을 이루며 내려와 하단부에서 짧게 끝난다. 굽 접지면의 유약을 닦아내고 가는모래를 받쳐 구웠다.

 이들 백자호 3점은 모두 경기도 광주 일대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최상급의 백자로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제작된 상품(上品) 자기들이다.

+ 기타 언론에 보도된 사진들.
(연합뉴스)
(연합뉴스/다음)
(연합뉴스/다음)
Posted by 게몽 :

조선 초기 묘로 알려진 노회신 묘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조선 시대 묘에서 벽화가 발견되기는 두번째이고, 사신도가 그려진 예는 첫번째 발견이다.

[게몽]

+ 연합뉴스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보도자료



조선시대의 두 번째 벽화묘 그 모습을 드러내다.

- 원주 동화리 벽화묘(노회신 묘)의 본격적인 발굴 착수 -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연 웅)는 4월 16일(목) 14:00, 강원도 원주시 동화리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벽화묘(노회신묘)에 대해 현지에서 학계의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개최하고 발굴조사 및 벽화의 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다.

벽화묘의 주인공은 교하노씨(交河盧氏) 15대손인 여흥도호부사 겸 권농병마단련부사(驪興都護府使, 勸農兵馬團練副使)를 역임한 조선시대 충정공(忠正公) 노회신(盧懷愼, 1415~1456년)이다. 지난해 노씨문중으로부터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실 내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제보에 따라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 현지조사를 실시한 바 있으며, 추후 정밀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문중과의 협의를 거쳐 석실에 대한 재 포장 등 임시 보호조치를 해왔다. 묘 이장 시 벽화묘의 봉분 둘레석과 석물(묘비석, 장명등, 상대석, 문인석)은 모두 충남 청양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벽화가 있는 석실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벽화묘는 1456년(세조 2년)에 조성된 조선시대 무덤으로, 방형 봉분(方形封墳) 내에 앞트기식돌방(橫口式石室) 두 개가 잇대어 배치되어 있다. 석실의 각 벽체는 하나의 대형 화강암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실의 천장은 각각 2매의 대형 판석으로 덮여 있다. 석실 내부의 벽면과 천장에는 먹과 붉은색 안료 등을 이용하여 그린 사신도(四神圖)와 인물도(人物圖), 성좌도(星座圖)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묘주가 안치된 북쪽의 석실과 매장 흔적이 없는 남쪽 석실이 벽화의 구성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묘를 축조할 당시 두 석실의 천장에 성좌도와 네 벽면에 사신도를 미리 그려 넣었고, 이후 묘주를 매장할 때에는 북쪽 석실의 벽면 하단에만 12구의 인물상을 추가로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물상은 벽면에 직접 묵선(墨線)으로 그린 인물의 윤곽, 손에 쥔 홀(笏), 머리에 쓴 책(幘, 쓰개의 일종)과 얼굴의 채색(彩色) 등 1352년 조성된 파주 서곡리(瑞谷里) 벽화묘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어 아마도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 동화리 벽화묘는 밀양 고법리 벽화묘(松隱 朴翊 묘, 2000년 9월 발견)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조선시대 벽화묘로, 십이지를 표현한 인물상과 더불어 사신도를 배치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유행한 사신도가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남쪽 석실의 사신도 가운데 백호(白虎)의 얼굴은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민화의 시원적 화풍을 느끼게 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국립문화재연구소(복원기술연구실)와 함께 조선시대 전기의 회화사, 복식사, 민속학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벽화묘의 발굴조사 및 보존처리를 공동으로 수행할 계획이다. 향후 보존처리가 완료되면 국가귀속절차를 거쳐 국립박물관 등 관련 기관에서 벽화묘에 대한 보존 및 활용방안을 마련하여 복원 및 공개 등을 추진하게 될 예정이다.


담당자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황인호, 어창선
전화번호 : 043-855-8962



도 1. 벽화묘의 석실 약실측도



도 2. 원주 동화리 벽화묘의 석실 노출 모습 (동쪽에서)



도 3. 북쪽 석실의 내부 벽화 모습 (동 단벽 쪽에서)




도 4. 북쪽 석실 서 단벽의 인물상 세부



도 5. 남쪽 석실 북 장벽의 백호 및 세부 모습

Posted by 게몽 :